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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시인의 눈] 사색의 별미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1년 02월 21일
ⓒ e-전라매일
남원팔경(南原八景) 중 하나가 축천모설(丑川暮雪)이다. 어둠이 깔린 축천(丑川)에 저녁 눈이 하얗게 내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말한다. 이 축천은 남원 시내의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요천과 합류하는 작은 하천으로서 지금은 광치천(廣峙川)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시민을 위한 생태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공원에 지금 모설(暮雪)이 내리고 있다. 늦은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제법 쌓이더니 길 위에 발자국을 깊게 남긴다. 사르륵사르륵 어둠 속에서 눈이 내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마른 갈잎이 부딪혀 흘러내리는 소리로 들리다가 점점 자라 웅웅거리는 먹먹한 형상으로 바뀌어 들려왔는데, 이 형상이 기르는 겨울 흰 소 한 마리가 눈 덮인 길 위를 앞서간다. 고독이란 놈이다. 하얀 옷을 입고 하얀 콧김을 내뿜으며 뚜벅뚜벅 걷는다. 앞길이 예정되어 있지 않아 종착지는 알 수 없으나 함께 걷는 내내 찾아드는 편안이 좋다. 가끔 고즈넉한 풍경에 압도되어 망연자실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시인마다 한 번쯤 시제로 삼았던 고독이 유난히 환대받을 때가 있다. 눈이 내리고 어둠이 내리고 이렇게 구색이 갖추어 있고 보면 그 고독이 더 빛나 보이는데, 외로운 듯 쓸쓸한 듯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 흔적들이 파적(破寂)처럼 소란하다. 지나온 길 위엔 그 고독의 잔류물이 반짝거린다. 돌아보면 꽉 막힌 생에 한 줄기 구도의 빛을 떠올린 게 분명하다. 뭔가 손에 하나씩 들고 가는 걸음이 든든하다. 이 생각 저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그 생각의 끝에 이르러 발길을 멈춘다. 이즈음이 나름의 얻고자 한 그 즐거움의 끝이다. 무작정 걷던 발길이 살포시 돌려진다.
저녁 눈을 맞으며 사색하는 별미. 그래서인가, 시인 노천명도 저녁 눈이 내리는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하여 목적지 없이 발길이 멈추는 곳까지 갔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 일이 종종 있었다 한다. 아마 고고한 사슴의 관을 쓴 시인의 심상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지난봄 능수 벚꽃이 피었던 나무 아래를 걷는다. 눈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벚꽃으로 떠올려 보고 있노라면 벌써 나무는 봄을 데려와 판을 벌이고 있다. 아무래도 우울 뒤엔 환한 봄이 제격이다.


곽진구 시인
전북시인협회 회원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입력 : 2021년 0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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